캄푸챠 여행 이야기

[캄보디아]재미있는 앙코르 와트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여행모으기" 낫티 2008. 1. 23. 04:06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유네스코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세계문화 유산의 한군데인 앙코르 와트...
이 거대한 제국이 탄생을 하고 또한 멸망을 하며 그후로 밀림속에 버려져 있기를 수백년....
그러다가 다시 프랑스인에게 발견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지 100여년...


아직까지도 밀림속에서 계속적으로 발견되어 지고있는 이 고대 제국의 흔적들은 과연 그 끝이 어디일까를 알 수 없을정도로 웅장하며 또한 찬란함을 자랑한다.


그들은 왜 이곳에 모였었으며 또한 왜 그렇게 모두가 떠나갔으며 또한 왜 그렇게 전설속의 도시로써 밀림속에서 깊은잠을 자게 된것일까?
그 미스테리속으로 낫티와 함께 들어가보자.

 

신들의 도시,신의 정원,상상이 조각 조각 해체되는 신들의 도시,

신들이 만들어 놓은 퍼즐......

 

이 모두가 앙코르 와트를 이야기하는 서양인들의 놀라움을 표현한 앙코르의 수식어 들이다.

 

더불어 서양 철학의 대두인 "토인비"는 할 수 만 있다면 앙코르의 유적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마치고 싶다고 까지하며 이곳을 극찬 하였다.

 

1850년 최초로 앙코르 와트를 발견한 프랑스의 샤롤 에밀 부유보 신부가 그곳에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신의 궁전이 있다고 증언을 할때 덩치가 큰 서양인들은 설마 키작은 아시아의 크메르 민족들이 그럴 수 있을수 있냐면서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13년뒤인 1863년...

나비를 찾아 정글을 해매던 곤충학자 앙리무어가 또 다시 정글속을 헤매다가 앙코르의 장엄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 밀림속의 거대 도시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그들이 정글속 악마의 사원이라고 얘기했던 바이욘의 미소

 

그들이 자랑하는 베르사이유 궁전 보다도 훨씬 더 크고 웅장한 키작은 크메르인들의 찬란한 유적인 앙코르 와트.

 

서양인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아시아인들의 뛰어난 고대 문명과 놀라운 손재주....

최근의 현대사 에서 까지도 수많은 시련과 아픔(길고 긴 프랑스의 침략과 킬링필드의 잔혹사)을 머금고 있는 크메르 민족 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최고의 최 빈국으로 힘든 나날을 살고 있는 키작고 가난한 그들이기에..

앙코르 와트를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그 놀라움과 경외로움은 훨씬 더 크고 신기한 것일 것이다.

 

현재의 그들의 너무나 가난한 모습은 도저히 앙코르 제국의 화려함과는 매치가 안된다.

 

앙코르 유적의 대표 선수?인 앙코르 와트

 

캄보디아에는 찬란한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전성기 때에는 이곳에 무려 200여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꺼라고 추측이 되어진다.

 

현재는 여행객들이 패키지로 또는 3일권 정도만 끊어서 이곳을 후다닥 �어보고 지나 가지만 전체의 앙코르 유적에서 그것도 앙코르 톰안의 크고 작은 건축물들만 둘러 보는데도 일주일 이상을 투자해야만 할 만큼 앙코르의 유적은 넓고 그리고 웅장하게 분포가 되어 있다.

 

앙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톰의 제일 중심에는 바이욘 사원이 있다.

 

그들의 목욕탕과 사원과 주택,탑,궁전,등등....아직도 미처 다 발견 되지 못한채로 정글 곳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미지의 유적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사진만 찍고 가는 단순한?여행객들에겐 말 그대로 거대한 돌덩어리의 폐허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열대 기후에 달구어진 짜증나고 힘겹게 달구어진 거대한 돌덩어리...

 

임금님의 목욕탕?이었던 쓰라쓰랑..

지금은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이 되었다.

 

하지만 간단하게 라도 그 역사를 이해하고 들어간다면 정말로 다양한 이야기들과 신비로운 크메르 민족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 바로 이 앙코르 와트가 될것이니.....

 

적어도 우리 노매드의 여행객들 만큼은 그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들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앙코르행 여행 가방을 쌌으면 하는것이 본 리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일것이다.

 

임금님의 코끼리 승차장? 이었던 코끼리 테라스랍니다.

 

그렇다면 앙코르 제국은 과연 언제적의 역사 이야기일까?

 

그중 많은 역사 학자들은 9세기 부터 15세기(802-1201년)까지를  앙코르 제국의 시기로 정의를 내리고 있음이다.

 

3세기경 부터 메콩델타를 중심으로 시작이된 크메르의 역사는 그 이후 5세기경에 인도의 힌두문화를 받아들이게 되고 6세기경 첸라왕국에 이르면서 그 절정을 향해 치딛기 시작한다.

 

이미 이 무렵에 영토가 남 베트남 부터 중국의 남쪽 지방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그들의 장쾌한 역사의 단면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8세기경 이 첸라 왕국은 두 왕조로 분열을 하기에 이르고 그중 하나인 톤레삽 동부 지역의 하첸라는 앙코르 문명의 직전인 9세기 무렵에 멸망을 하기에 이른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민물 호수인 톤레삽 호수

 

이때부터 비로서 앙코르 제국의 역사는 쓰여지기 시작하는데....

 

앙코르의 역사는 자야바르만 2세때 부터 시작이 된다고 보면 될것이다.

이 자야 바르만 2세는 크메르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왕으로써...

우리나라로 친다면 단군 할아버지 정도로 캄보디아 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790년 수비자야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온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 하면서 인드라푸라에 수도를 정한 뒤 그후 세차례 거점들을 옮겨가게 되는데 그중 한곳이 현재의 룰루오스 지역이 되는것이다.

 

그후 그는 다시 수도를 앙코르톰의 북부지역인 프놈꿀렌 지역으로 옮기면서 신과 왕은 일치한다는 "데바라쟈"를 천명하게 된다.

 

그후 인드라바르만 1세(877-889년)때는 바꽁을 시작으로 프레아꼬, 바라이 지역들을 건설하게 되며 그의 아들인 야소바르만 1세(889-900년)에 이르러 롤레이 사원과 프놈바켕,프놈복,프놈끄롱등의 사원을 건설하게 되는것이다.

 

일몰이 유명한 프놈바켕 사원이다.

 

그후 전성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의 시작은 현재의 태국의 남부 지방의 혈통인 수리야 바르만 1세때:1002-1050년)로써 이때의 영토는 이미 현재의 태국만에 까지 그 세력이 확장되게 되는것이다.

 

그 뒤를 이은 수리야바르만 2세때는 현재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인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게 되며 그는 앙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앙코르 제국의 위대한 건축물인 앙코르 와트 이다.

 

이 사원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단순한 글로써 표현 한다는것이 사실은 좀 오버이다.

그만큼 위대한 인류의 몇 안되는 문화 유산중의 하나일것이다.

 

그러다가 자야바르만 7세(1181-1201년)때에는 대승 불교를 받아 들였으며 가장 활발하게 도로와 사원,교량들을 건설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 많은 전투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영토를 서쪽으로는 현재의 미얀마의 영토인 바간지역과 동쪽으로 베트남의 해안지역 그리고 북으로는 라오스의 비엔티안 지역까지 확장을 하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망과 더불어 다시금 앙코르 제국은 참파에게 합병을 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고 이웃의 아유타야 제국이 번성 하면서 결국엔 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앙코르 톰에서 프놈펜으로 옮기게 되는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앙코르는 찬란했던 문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려야 했던것이다.

 

남문의 고푸에 새겨진 자야바르만 7세..그는 결국 그렇게 앙코르의 멸망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후 프놈펜으로 옮겨간 크메르인들 에게서는 앙코르의 그 어떤 건축 기술과 재주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된다.

완전히 변화된 또 다른 크메르 건축 양식으로 그 이후의 크메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는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것도 역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하긴 뭐 우리도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다시금 고려 청자의 비취색을 재현해 내라고 해도 그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니...뭐.....

 

 

앙코르 유적중 가장 아름다운 유적중의 하나인 반띠아이 스레이

 

반티아이 스레이의 이런 조각들은 앙코르가 아니면 만나볼 수 가 없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것 중의 하나가 앙코르의 역사의 상당 부분이 태국의 역사와 섞여 있는 부분을 찾을 수 가 있는데....

 

현재까지도 태국인들과 캄보디아의 후손들 사이에서는 과연 앙코르 와트의 원 주인이 누구이냐에 대한 부분을 가지고 논쟁이 자자하다.

 

불과 몇년전에는 태국의 한 연예인이 방송에서 앙코르 와트는 태국의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가 프놈펜의 태국 대사관이 흥분한 캄보디아 시민들의 화염병 습격을 받아 불에 타기도 했었다.

 

앙코르와트의 서북쪽 회랑은 태국인들이 만든것으로 전해진다.

 

크메르인들이 만든 회랑의 조각들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의상과 두발의 상태?도 태국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다시 앙코르 제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설라무네.....

 

그렇다면...

수도를 옮겼다고 해서 어떻게 그 많은 인구의 거대 도시가 하루 아침에 정글속의 폐허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신라는 망해도 그 후손들은 계속적으로 경주에 남아서 그 후대를 이어가는것이 정설이거늘 2,000명도 아니고 200만명이라는 인구가 그렇게 갑자기 동시에 사라진다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한 이야기 일까?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그 찬란한 유적들을 모두 뒤로 한채 모두가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는 있는것일까?

 

 

따프롬은 정글속으로 뭍혀졌던 앙코르의 흔적을 가장 잘 보여 주는곳이 틀림없다.

 

 쁘리아 칸에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 중에는 현재 몇가지의 학설들이 존재를 하는데 그 하나는 인근 타이족(시암제국)의 융성으로 인해 남아 있던 모든 크메르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설이 그 하나이며 또 하나의 설은 열대 지방에 종종 창궐하는 무시 무시한 전염병으로 모두가 병들게 되고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또 하나이며 제일로 설득력있는 또 하나의 설은 앙코르 와트의 건설에 동원되어 졌던 노예들의 반란설이 그 중에 가장 유력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 반란군은 왕권이 사라진 폐허의 땅에서 그 동안의 원한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그 원한을 푸는 방법으로 그들을 부렸던 주인들과 주민들을 처참하게 응징하게 되니 앙코르 전역은 그들의 복수극으로 인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 목조 건물들은 모두가 불에 타서 없어지게 되었다한다.

 

그리고 난 후 그들도 역시 시체와 죽음이 가득한 앙코르를 마지막으로 떠나가기에 이르니....

거대한 제국은 그렇게 그렇게 정글속에서 긴 시간동안 뭍히게 되었던 것이었다.

 

맨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저 소년의 조상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이었다.